본문 바로가기
시크릿 자료실 2

컬렉터, 유한한 인생으로 무한한 미래를 기약하는 사람들

by 제주 알리미 2011. 11. 9.
728x90
반응형

[오래된 아름다움을 찾아서]<11>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생애를 오로지 서화 골동 수집에 바쳤던 특별한 컬렉터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삶에 대한 가치관은 달랐을지 모르겠으나 오로지 컬렉션을 향한 그들의 열정과 집념은 한결같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우리 역사에서 어찌 그들만이 참된 컬렉터의 길을 걸었다고 할 것인가? 오히려 또 기록이 없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나, 실로 수많은 사람이 각자 가슴에 품은 컬렉션 정신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 길을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이름과 기록을 남기지 못한, 아니 남기지 않은 컬렉터들이 자신의 컬렉션 욕망을 불태워 컬렉션 문화의 토대를 쌓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우리 컬렉션의 역사는 써질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런 무명의 컬렉터들이 있어 기록에 남은 컬렉터들이 더 빛나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컬렉션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아름다움을 찾아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흔히 컬렉션을 열정과 집념의 소산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열정과 집념은 기본적으로 물건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진실로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물건을 수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많은 컬렉터들이 아름다움을 향한 그들의 간절한 사랑을 열정으로 집념으로 불타오르게 하면서 컬렉션에 몰두하였건만,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수많은 컬렉터와 컬렉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명품에는 유랑(流浪)과 유전(流轉)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컬렉터들의 이름은 남았으되 그들이 혼신의 열정과 집념으로 수집한 대부분의 컬렉션은 흩어지고 사라졌다. 열정과 집념으로 수집은 이루었으나 그것을 영원히 지키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조선 시대 그 많았을 미술품 컬렉션이 이곳저곳에 간혹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이고, 근대 제일의 위창(葦滄) 오세창의 컬렉션도 그런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추사의 세한도를 손에 넣기 위해 불태웠던 열정과 집념으로 조선 서화의 정수를 수집했던 손재형의 컬렉션도 그의 생전에 다 흩어지고 지금은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不二禪蘭). '난초와 선(禪)은 하나'라는 의미가 담긴 추사의 사란(寫蘭)정신을 읽을 수 있다. 소전(素筌) 손재형이 일본에 가 후지츠카로부터 세한도를 양도받을 때 함께 인수한 작품이다. 작품 곳곳에 수장가와 감상인의 낙관이 남아 있어 유랑하는 명품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길아트

미술품은 명품일수록 권력과 돈을 쫓아 유랑하는 운명적인 존재라고 하지 않던가. 권력과 돈은 부침하는 것. 운이 다하면 사라지듯 컬렉션도 그런 운명을 타고 나는지 모르겠다.

많은 컬렉터들이 자신이 수집한 명품에 그런 유랑과 유전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을까? 알고도 그건 그들의 운명이라고 체념했을까?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컬렉터 안평대군은 그가 수집한 컬렉션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은 기막힌 독백을 남기고 있다.

"아하! 물건의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으며 모이고 흩어짐이 운수가 있으니 대저 오늘의 이룸이 다시 내일의 무너짐이 되고, 그 모음과 흩어짐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될는지 어찌 알랴."

여기서 나는 다시 컬렉션에 담긴 유랑과 유전의 의미를 생각한다. 앞에서 나는 컬렉션은 욕망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을 독점하고자 하는 소유 욕망. 그건 개인적 차원의 아름다움으로 가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자신을 벗어나 사회로 향할 때, 물건의 사유(私有)에 갇힌 컬렉션은 세속적 경계를 뛰어넘어 빛을 발한다고 했다. 개인적 차원의 욕망이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건 열린 컬렉션이자 사회적 컬렉션이다. 닫힌 개인적 컬렉션에서 열린 사회적 컬렉션으로 가는 길. 컬렉션이 독점하려는 욕망을 넘어 진정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길이고, 그 길은 유랑과 유전의 운명을 타고난 명품들을 그 운명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길이다.

그 길의 의미를 알았기에 수정(水晶) 박병래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수집품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했고 동원(東垣) 이홍근도 그 길을 걸었다. 또 많은 컬렉터들이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자신들의 수집품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주었다.

▲ 기증자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실 입구. 수정 박병래, 동원 이원홍의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분신이나 다름없는 수집품을 기증했다. ⓒ한길아트

또 컬렉션은 경제행위이기도 하면서 문화행위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행위의 의미는 미술행위가 창작에서 시작되고 컬렉션을 통해 완성된다는 관점에서 미술품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문화행위로서 컬렉션이란 말에는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을까? 아닐 것이다. 그 정도의 의미라면 인류 역사와 함께해온 컬렉션 역사의 강한 생명력을 설명할 수가 없다. 거기에는 감상과 소장의 의미를 넘어서는 좀 더 근원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에 지금껏 수많은 컬렉터들이 온갖 어려움을 마다치 않고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살펴본 상고당(尙古堂) 김광수의 독백에서 컬렉션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발견한다. 자신의 컬렉션에 대해 먼 훗날 알아주는 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며 그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겼던 상고당 김광수의 자의식도 따지고 보면 컬렉션에 대한 컬렉터의 근원적인 고민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 아닌 질문을 앞에 두고 나는 "컬렉션의 길은 한번 나서면 쉴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길이다"는 말에 함축된 컬렉션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 의미는 지금까지 내가 이 글에서 견지해온 컬렉션의 두 핵심어, 즉 욕망과 본능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컬렉션의 좀 더 본질적인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컬렉션에 담긴 문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다

열정으로 사명감으로 몰입하게 하는 또 다른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컬렉션이라는 말만으로 가슴이 뛰는 것이고, 또 아름다움을 찾아서 쉼 없이 여정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로써 글로써 표현이 안 되는 그 무엇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컬렉션 정신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나 유기체는 생성소멸하고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생성소멸, 흥망성쇠는 그 누구도, 아니 어지간한 신도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이치이자 질서다. 우리 인간이 그렇고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기업이나 제도, 체제, 민족, 국가도 그러한 질서에서 제외되거나 자유롭지 않다.

우리 인간은 흔히 세 세계의 삶을 산다고 한다. 첫째는 육신의 삶이다. 우리는 사람의 육신이 통상 10년 단위로 성장노화 과정을 거치고 죽음에 이른다고 표현한다. 가장 익숙한 삶이고 그래서 가장 집착하는 삶이다.

다음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국가사회의 삶이다. 국가사회의 힘은 100년 단위로 그 흥망성쇠를 평가한다. 육신의 삶보다는 생의 주기가 길고 그 의미도 복합적이다. 마지막 세 번째 삶은 문화행위(종교도 포함된다)를 통한 삶이다. 문화는 1000년을 단위로 흥망성쇠의 순환 질서를 평가한다. 그만큼 문화의 힘(삶)은 질기고 그 영향(생명력)은 오래간다는 의미다. 약간 과장하면 영원 또는 무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에 내재된 흥망성쇠의 질서는 사람의 안목이 아닌 역사적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최소한 천 년, 이천 년의 시공을 아우르지 않고서는 문화의 본질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정한 컬렉터는 자신의 컬렉션에 담긴 문화의 의미를 문화세계를 통한 인간의 삶으로 이해하고 그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천 년이라는 시계(時界)를 생각하고 그 이후 전개될 삶의 모습에 몇십 년에 불과한 자신의 컬렉션 인생을 거는 사람이다. 기껏 10년 단위로밖에 평가하는 유한한 육체적 인간의 존재를 벗어나 영원의 삶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말로서 글로서 표현할 수 없는 컬렉션의 의미이고 컬렉션 정신이기도 하고 컬렉션의 힘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컬렉션 인생은 길어야 40~50년이다. 지금의 40~50년 컬렉션 인생으로 천 년, 이천 년의 미래를 기약하는 사람들! 경이로운 컬렉터들에게 바치는 나의 마지막 헌사(獻詞)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컬렉터들에 대한 위로의 말이다.
저자 김치호

195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77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통계학 석사(1983), 경제학 박사(1987) 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 동안 한국은행,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한국의 거시경제, 통화정책, 금융위기를 연구했다. 정리금융공사 사장을 역임했고,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의 거시경제 패러다임>(2000, 한길사) , <고미술의 유혹>(2009, 한길아트) 등을 저술하고 논문 5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발표했으며, '유망 미술작가 해외진출 후원모임'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 미술시장 저변 확대를 위한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김치호 <고미술의 유혹> 저자 필자의 다른 기사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