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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이야기

역사를 ‘그림’으로 쓰다 - 변시지

by 제주 알리미 2020.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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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작가의 작가적 형성 배경과 그것이 어떻게 작품에 투영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결부시켜 거론한다. 작가는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면서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을 독특한 시각으로 새롭게 창출해 내고 형상화시킨다.. 거기에 자연이 합세하여 그것들이 서로 조화된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형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용어 자체가제국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저항과 탈식민주의를 제시하는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나 사회는 그 영향이나 잔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해방이후 일제강점기 식민지배하에서 형성된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오랫동안 자유롭지 못했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식민지배는 역사적으로는 끝났지만 사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변시지(1926~2013)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제주 풍경을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보인 작가이다.

이 작가의 작업이 포스트식민시대의 이야기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과 예술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가가 작업을 통해 당대의 특수한 사회와 정치적 상황에 어떤 몸짓으로 반응하고 저항했는가를 알아보려고 한다.

 

  변시지는 일생에 세 번 화풍이 바뀐다.

흥미롭게도 그의 화풍은 세 번의 바뀌는 환경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바뀐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서귀포시에서 태어난 변시지는 6세 때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간파한 선친을 따라 가족들과 일본으로 건너간다. 오사카 미술학교에서 양화를 전공하고 8.15 민족 해방을 거기에서 맞았다. 그 후에도 한동안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23세의 나이에 일본의 대표적인 공모전인 '광풍회전'에서 역대 최연소로 최고상을 받는다. 당시 권위적인 일본 화단의 풍조에 비춰볼 때 23세의 조선 청년이 최고상을 거머쥔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그는 주로 인물화를 그렸다. 그의 인물상들은 한결같이 의자에 앉은 상반신 중심의 포즈이다. 그 시기 작품들에서 좌상이 많은 것은 당시의 일본 화단의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일본이 서양에서 배워 와서 일본화한 것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므로 문화의 교류혼종성의 관점에서도 서양, 혹은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탈 아카데미즘적인 요소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유미주의에서 벗어나 인상파 혹은 표현주의적 감정 표현들이 경쾌한 색채와 터치에서 희미하게 느껴진다.

 

  그는 31세인 1957년 일본에서의 명성을 뒤로한 채 귀국한다.

전쟁이 막 끝난 서울은 혼란스러웠다. 일본에서 민족적 차별을 심하게 받았던 변시지는 고국에 오면 알아주겠지하는 마음으로 귀국을 결심했지만, 막상 고국에 돌아와 보니 학연으로 연결된 파벌 싸움과 밥그릇 싸움이 판치는 당시 화단의 폐해에 또 한 번 실망한다.

변시지는 일본인과 다른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우리 민족성과 개성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주위 환경과 여건이 그로 하여금 우리 그림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동시대의 문화적 조건과 그로 말미암은 예술 표현상의 고뇌가 진하게 느껴진다.

변시지는 한국의 전통미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 비원을 매일 같이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는 섬세하면서도 치밀한 묘사가 주종을 이룬다.

그는 서양의 새로운 미술사조에 편승하려는 시류의 작품 형식보다는 전통적인 회화 의식으로 자신의 화면을 충실히 내면화하는 자세와 태도를 견지했다.

 

  1975년 고향 제주에 정착하면서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고 자신의 근원을 제주에서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빛과 기운을 통해 인간의 삶을 재해석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연 세계의 재해석의 방법과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독자적 시각이다. 서양화의 형식과 과정을 철저하게 익힌 그이지만 제주에서 펼쳐놓은 화풍은 동양화에 가까웠다. 황토빛 화면 위에 까만 먹선으로 풍경의 구체적 형태를 간명하게 그려내는 '변시지 양식'이 탄생한다. 문인화의 선묘처럼 붓질의 강약으로 표현된 작품의 이미지들은 대상의 외형보다는 작가의 정신성을 강조하는 동양화의 그것과 닮았다.

 

 

 

  황토빛에 먹선이 들어간 제주화는 이제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변시지의 그림은 사의적(寫意的)이다. 그림에는 슬픔과 연민이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태양은 강렬하다. 그의 그림에는 그림자가 없다. 명암도 없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상물이 갖고 있는 감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의 바람을 그린다. 제주의 역사는 바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거다.

그가 평생을 갈구하던 예술의 모태는 그가 태어난 섬 제주의 거센 바다와 바람에서 잉태된 고귀하고 순수한 생명을 찾는 일이었다.

 

  그가 일본과 서울을 거처 제주에 정착하는 동안 그의 작품세계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에게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슴 한쪽에 잠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간의 작업들을 통해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재나 대상, 작품의 주제나 정신주의가 제주 풍경으로 환치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변시지의 작품세계는 동양적 사유에 바탕을 둔 농밀한 한국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가 한국성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된 것은 1981년 유럽 여행에서 느낀 감정의 변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케치 여행을 하면서 우리의 소중함을 깨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보다 한참 앞서 있는 서양의 것을 흉내 낸다는 것은 아류에 불과하며 이러다간 민족성과 개성마저 말살될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와 갈등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이러한 자각은 보통 작가 개인이 내면적 세계를 향해 심화되는 것이다.

예술성은 태어난 그곳의 자연에서 삶을 영위하며 마음을 다하여 그림을 그려야만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 평소의 지론에서 기인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현대적이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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